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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독서실

20100328 폭식-김재영

<라디오 독서실 - 한국인이 사랑하는 우리 문학>
김재영 『폭식』

안녕하세요? 아나운서 김경란입니다.
봄 산천 황명걸

개나리 노랑 저고리 입었다

청맹과니 대낮에

어두움을 밝히기 위하여

진달래 빨간 숯불 피웠다

부엉이 산천에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버들 가지 파릇파릇 물이 올랐다

벙어리 냇가에

물소리 나게 하기 위하여//

아 여기저기 움트는 소리

미물들도 기지개를 켠다

네. 황명걸 시인의 ‘봄 산천’입니다.

올 봄은 이상하게 오는 길이 힘든 것 같지 않으세요?

저만 느낀건가요.

올 봄에는 눈도 많이 오고

기온도 예년에 비해서는 추운 편이구요....

이렇게 어렵게 와서 그런가요.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쉽게 얻지 않고 힘들게 얻은 것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그런 마음이겠지요.

KBS라디오독서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우리 문학,

오늘은 김재영 작가의 <폭식> 입니다.


(해 설) 린도우인 미라를 본 날, 나는 저녁식사로 나온 양고기 스튜를 반 이상 남겼고 그나마도 소화시키지 못했다. 체증은 며칠간 계속되다가 겨우 사라졌다. 동시에 세상을 떠도는 동안 지속된 내 폭식의 습관도 사라졌다. 오랜 해외생활중에 가끔 한국에 들를 때마다 탐식하던, 고추장을 잔뜩 넣은 비빔밥마저 거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위가 꽉 찬 상태가 싫었다. 온갖 나물들을 배 속에 넣고 ?겨나다시피 조국을 떠난 십여년 전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보...? 뭐래요? 우리가 그 빚, 갚아야 된대요? 이럴줄 몰랐죠. 사장님이나 저나 둘 다 여행사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라 아는 거래처만 관리해도 굴러갈 줄 알았는데... (운다) 여보 미안해요.  형님한테도 연락이 없대요.  (불안) 여보... 빚쟁이들이 우리 집까지 알아냈나봐.

(해 설)그러나 가열로사업부에서 꽤나 인정받는 사원이던 나도 해고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월급을 차압당하는 직원이란 사생활이 복잡하게 마련이라는 통념이 나를 밀어낸 것이다. 하필 왜 나란 말인가. 원망도 많이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어떻게든 제물이 필요한 때에, 누군가를 붙잡아 린도우인처럼 온몸을 꽁꽁 묶고 목을 꺾은 뒤 늪 바닥에 내던져야만 했던 야만의 시기에 하필이면 내가 걸려든 것이다. 나는 재빨리 도망칠 수 없는 한 마리 상처 입은 영양이었다. 나는 무작정 홍을 찾아갔다. 내 직속상사였던 홍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빌었다. 며칠 뒤 홍은 내게 일본행을 권유했다. 일본의 중소기업에서 가열사업부 직원을 채용한다고. 외국에서 산다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해 설) 린도우인의 형상을 지우려 나는 세차게 머리를 흔든다. 또다시 속이 거북해진다. 갈비찜으로 꽉 채운 위장이 활동을 거부하면서 불쾌한 두통을 유발한다. 죽음의 늪에 던져졌다가 가까스로 살아나온 지금, 나는 유령이다. 온몸에 붕대를 휘감고 있는 미라다.

(해 설)홍이사는 창유리 너머 사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쪽 입술을 냉정하게 비튼다. 사내들은 이제 불타버린 잿더미를 둘러싸고 장례식을 치르는 양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다. 빌딩 밖으로 나오자 뜨겁고 끈적끈적한 공기가 전신으로 훅 밀려온다. 사내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 홍에게 달려든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운명을 좌우할 권한을 가진 나에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혼잣말) 홍이사가 왔나보네. 낮에 회사에서 만나 종일 함께 있다가 헤어졌는데 아직 할 말이 남은거야 뭐야. 지겹도록 이야기해놓고도 모자라 숙소로 들이닥치다니. 어휴 (하며 현관으로 가서 문 열어준다)

(필. 미안한) 그럼 세입자한테 연락해야겠네. 말 안했던가? 네가 워낙 뜸하게 와서 세를 줬어. 주인이 올 때만 며칠 비워주는 조건으로. 대신 좀 싸게 놨지...(톤 바꿔) 니 형부, 또 사고쳤잖니? 내가 못산다 못살아. 하루에도 몇 번씩 갈라서고 싶지만 애들 때문에.

(필. 울상) 큰애가 갈수록 비뚤어져. 도통 내 말을 듣지 않아. 야단을 쳤더니 집을 나가 밤늦도록 안 돌아와. 어떡해. 내가 일본말 서툰 걸 알면서도 그앤 고집스럽게 일본말로만 말해. 그러니 대화가 될 게 뭐야.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내 말 듣고 있어? 이젠 둘째까지 제 오빠처럼 굴어. 의논할 상대도 없고.... 당신 언제 돌아오는 거야? 한국이 아니라 미국으로 가고 싶어. 미국 가자. 집도 없고, 직장도 없고, 빚만 잔뜩 있는 한국으론 절대 돌아가지 않을거야.

(눈 뜨고 남자 발견) 누 누구? 야, 이 미친놈아, 너 죽을래? (하며 뺨 때린다)  (두리번) 어어... 내가 왜... 그냥 술 마시고 습관적으로 들어왔나봐. 나야 여기 사니까 번호 누르고... 아우 어떡해.

알았습니다. 갑니다 가요. (일어나 욕실로 이동)

저기... 물 대신 소주라도 마실래요? 제 가방에 하나 있을 텐데. 어제 먹고 남은 거지만. 잠깐만요. (여자 가방 뒤져 소주 찾는)

어머, 벌써 돌아오셨네. 빨래 할게 있어서.  빨리 나갈게요. 말리기만 하면 되거든요. (여자 빨래 넌다)  외국 사신다면서요? 너무 멋져요. 전 외국생활하는 게 소원인데, 어디서 사세요? (호들갑) 국경을 떠돈다고요? 어머, 정말 멋져요.낭만적이야. 하지만 여행가방을 든 신사가 낯선 도시, 낯선 호텔로 걸어들어가는 풍경을 상상해보면...... 슬프도록 아름답잖아요. 난 이 지긋지긋한 나라를 뜨고 싶어. 평생 여행만 하면서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지난 주에 직장에서 정리해고됐으니 당분간 여행가긴 글렀어요. 생활비 벌기도 힘든 판에. 후후후